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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
by 고상섭2024-04-0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 중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하지 말고 삼위일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설교에서 그리스도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본문에 맞춰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신학적으로 더 균형 있는 말인 것처럼 들리지만 이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이 곧 삼위일체 중심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설교여야 한다는 명제가 증명되려면, 먼저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이 아니다”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적이지 않은가? 프레스 샌더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에서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더욱 삼위일체적이 된다고 설명한다. 


“만일 성육신이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세 위격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 위격은 계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차이점에 의해 서로를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에서는 하늘에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고, 오직 익명의 셋만 있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만 삼위일체의 구분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양자됨으로 우리가 성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부와 성령과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사역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적일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가 더욱 찬란하게 계시된다.


센더스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은 성부를 망각하는 것도 성령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 히브리서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는 말씀이 있다면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예수를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가 보내는 성령에 대해 생각한다. 즉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도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모든 설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자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신약의 서신들은 처음에 시작되는 인사말과 끝에 나오는 축도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다. 11개의 신약의 서신서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언급한다. 자세히 보면 성령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 서신이 ‘성령님’을 뺀 잘못된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자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설교한다는 것이고, 설교를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심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리스도 중심 설교야말로 최선의 삼위일체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설교가 존재하는가?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표현은 듣기에는 좋지만 학술적 정의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다양한 신학 근거를 가진 책들과 실용서들이 출판되었지만,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설교학 교과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삼위일체 설교’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가? 모든 설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반드시 다 거론해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본문에서 성부가 나올 때는 성부만, 성자가 나올 때는 성자만, 성령이 나올 때는 성령을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 본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오지 않는 본문을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에서 말하는 것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 중심 설교라면, 삼위일체가 모두 등장하지 않는 본문은 늘 인간의 스토리만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 본문이 포함된 문맥과 각 책, 구약과 신약의 전체 속에서 설교할 본문을 바라보는 숲속의 나무로 본문을 보는 성경신학의 눈이 생길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말은 명확한 실체가 없는 표현이기에 실례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않고 삼위일체적으로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삼위일체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삼위일체 중심 설교인지 구체적인 설교문을 보고 싶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주장은 많지만 정작 삼위일체 설교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학문 근거도 실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일 뿐이다. 


삼위일체 설교는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삼위일체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극단적으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는 설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래드 샌더스도 삼위일체를 깨뜨리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이 유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보내신 성부의 사랑을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의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존재 그대로를 보는 데 실패하게 된다.”


결론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 요점을 살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곧 삼위일체 중심 설교이다. 둘째, 삼위일체 중심 설교의 구체적인 예와 원리가 명확하지 않다. 셋째, 그러함에도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고려하지 않는 설교를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삼위일체 중심 설교는 결국 그리스도 중심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의 풍성함이 더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라는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욱 아름답고 찬란하게 드러내어서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이 선포되도록 더욱더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삼위일체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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